액자 없이 걸린 그림을 상상하며

근사한 그림 한 점을 떠올려 봅니다. 거장의 혼이 담긴 캔버스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그림을 벽에 그냥 붙여두지 않습니다.

작품의 결을 살리는 액자를 고르고, 가장 적절한 높이와 조명을 계산해 그림을 겁니다. 액자와 조명, 그리고 그림이 걸린 공간 전체가 모여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경험’이 됩니다. 액자 없는 그림이 그저 ‘물감 묻은 천’에 머물 수 있듯, 기술의 세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모델의 시대가 저물고, 시스템의 시대가 온다

지금까지 인공지능(AI) 분야의 경쟁은 더 강력한 ‘심장’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더 거대한 파라미터로 무장한, 소위 가장 똑똑한 AI 모델을 만드는 데 모두가 열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경이로운 지능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질문의 방향이 바뀌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똑똑해질 수 있는가’에서 ‘이 지능을 어떻게 안전하고 유용하게 쓸 것인가’로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네스(Harness)’라는 개념이 강력한 은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네스, 즉 ‘마구(馬具)’는 야생마를 길들여 사람과 함께 달릴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AI에서의 하네스는 강력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AI 모델을 둘러싼 모든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데이터 입출력 파이프라인, 외부 도구와의 연결, 사용자와의 상호작용, 안전장치 등 모델을 제어하고 그 능력을 온전히 이끌어내는 모든 구조물이 바로 하네스입니다.

정교한 하네스를 위한 세 가지 방향성

AI 모델이 제품의 ‘심장’이라면, 하네스는 그 심장을 보호하고 온몸에 피를 보내는 ‘갈비뼈와 혈관’입니다. 개인적인 관찰에 따르면, 미래 AI 엔지니어의 역량은 이 하네스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하네스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오늘날 AI 기술의 여러 흐름 속에서 그 방향성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스스로 학습하는 고리: 자율적 실행 구조

첫 번째는 AI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관찰하여 다음 행동을 수정하는 구조입니다. 가령 ‘여름휴가 계획’이라는 목표를 받은 AI가 스스로 항공편 검색을 시도하고(행동),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관찰),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보는 식으로 계획을 수정해 나가는(수정) 그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엔지니어의 역할은 AI 모델 자체를 훈련시키는 것을 넘어섭니다. AI가 세상을 ‘관찰’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통로를 만들고, 실패했을 때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를 설계하는 일이 핵심이 됩니다.

2. 세상과 연결되는 손과 발: 확장 가능한 도구

두 번째는 AI에게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손과 발’을 쥐여주는 것입니다. AI 모델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계산만 할 수 있는 두뇌와 같습니다. 여기에 계산기, 웹 검색, 코드 실행기 같은 ‘도구’를 연결해주면 비로소 복잡한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머리로만 풀기 어려운 계산을 계산기에 맡기듯, AI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적절한 도구를 호출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구를, 어떤 권한으로, 어떻게 안전하게 사용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하네스 엔지니어의 중요한 고민이 될 것입니다.

3. 인간과 함께 추는 춤: 협력적 인터페이스

마지막은 AI와 인간의 협업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일입니다. AI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인간의 개입을 요청하고, 대화의 맥락을 잊지 않도록 기억을 관리하며, 인간의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를 개선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채팅창을 만드는 것을 넘어섭니다. AI의 작업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인간이 언제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정교한 ‘조종석’을 설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술에 대한 맹신이 아닌, 인간과의 건강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철학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만드는 사람에서, 가꾸는 사람으로

머지않아 AI 엔지니어라는 직업의 의미는 지금과 사뭇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발명가’의 모습에서, 이미 존재하는 강력한 존재와 세상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정원사’나 ‘건축가’의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우리는 이제 막 경이로운 심장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 심장이 세상 속에서 난폭하게 뛰지 않고, 우리 삶의 리듬에 맞춰 온기를 전할 수 있도록 정교한 갈비뼈와 혈관을 짜 맞추는 일입니다.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은 액자이듯, AI의 가치를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그것을 둘러싼 ‘하네스’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