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낡은 일기장을 마주하는 기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잊고 있던 낡은 노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몇 년, 혹은 십수 년 전의 내가 꾹꾹 눌러쓴 문장들. 서툰 생각, 치기 어린 감정, 이제는 희미해진 다짐들이 그 안에 고여 있습니다. 그 글을 쓴 것은 분명 나 자신이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기에 마치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묘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최근 한 통의 이메일을 받고 꼭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글쓰기 플랫폼 ‘미디엄(Medium)’이 ‘2026년 글쓰기 현황(State of Writing 2026)’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공개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000명이 넘는 미국 작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현재와 AI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업계 동향 보고서라기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거대한 단체 일기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며, 또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그 보고서는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협업자, 혹은 그림자

보고서의 핵심은 단연 인공지능(AI)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일 겁니다. 이제 AI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닙니다. 어떤 작가에게는 막힌 문장을 뚫어주는 영리한 조수이고, 다른 작가에게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 고유한 문체를 흉내 내는 섬뜩한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한 작가가 AI의 도움을 받아 글을 완성했다면, 그 글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문장을 다듬는 과정에서 AI의 제안을 수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최종 결과물은 온전히 ‘나의 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 창작의 주체성과 소유권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보고서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내적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AI를 글쓰기 과정에 얼마나 깊이 통합하고 있는지, 그로 인해 창작의 기쁨이나 고통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이 담겨 있을 테지요.

미래의 날짜가 찍힌 보고서

흥미로운 점은 보고서의 제목에 ‘2024년’이 아닌 ‘2026년’이라는 미래 시점이 명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오기인지, 아니면 의도된 명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후자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것은 현재에 대한 기록을 넘어, 불과 2년 뒤 우리가 서 있을 지점에 대한 예측이자 경고일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2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의 불안과 기대가 2026년에는 어떤 현실이 되어 있을지를 가늠해보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미래의 글쓰기 방식 한가운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변화의 규모와 깊이를 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 보고서는 우리가 이미 통과하고 있는 터널의 출구 쪽 풍경을 미리 보여주는 망원경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불안을 비추는 거울의 값

미디엄의 발표에 따르면, 이 보고서의 전문과 관련 기조연설은 유료 구독자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된다고 합니다. 작가들의 집단적 불안과 희망을 담은 이 보고서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점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고, 동료들의 생각이 궁금하며,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 간절한 마음에 가격표가 붙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시장의 논리겠지요. 우리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려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 현황’을 결정하는 것은 보고서가 아닐 겁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빈 화면이나 백지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기어이 첫 문장을 써 내려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됩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생각과 감정을 고유한 언어로 번역하는 그 지난한 행위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보고서는 그저 우리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려주는 이정표일 뿐, 어디로 가야 할지는 결국 다시 각자의 책상 앞에서 결정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