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의 서랍, 그리고 지식의 형태

오래된 식당의 주방 한편에는 으레 낡은 나무 서랍장이 하나쯤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닳고 닳은 레시피 카드들이 빼곡합니다. 어떤 카드는 육수를 내는 법을, 다른 카드는 특정 소스를 만드는 절차를 간결하게 담고 있습니다. 숙련된 요리사는 이 카드들을 뒤적여 새로운 요리를 창조하거나, 변주를 가미합니다.

그는 양파를 볶을 때마다 매번 불의 세기와 시간의 상관관계를 처음부터 탐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검증되고 체화된 ‘양파 볶기’라는 하나의 완결된 기술을 서랍에서 꺼내 쓸 뿐입니다. 인간의 전문성이란, 이처럼 방대한 지식을 낱개로 흩어놓는 것이 아니라, 재사용 가능한 ‘기술의 묶음’으로 정리해두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AI,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는 법

최근 인공지능 분야의 흐름을 보며, 저는 종종 이 요리사의 서랍장을 떠올립니다.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해 과업을 수행하는 ‘AI 에이전트(Agentic AI)’가 화두가 되면서, 지능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법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AI가 거대한 단일 백과사전 같았다면, 이제는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 행위자들의 집합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수많은 에이전트들은 매번 모든 일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만약 한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의 결과물을 평가하거나, 여러 에이전트의 작업을 조율해야 한다면, 그 절차를 매번 새롭게 추론하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이전트 스킬(Agent Skills)’과 같은 개념이 고개를 듭니다. 이는 마치 요리사의 레시피 카드처럼, AI가 특정 하위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미리 정의된 절차의 묶음입니다. AI가 매번 새로운 코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하는 대신, 검증된 레시피들을 조합해 과업을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기술’이라는 이름의 레시피

에이전트 기술의 핵심은 ‘모듈화’와 ‘재사용’에 있습니다. 최근 주목받는 기술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가령 우리가 AI 에이전트의 기술 서랍장을 상상해본다면,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레시피 카드’들이 들어있을 겁니다.

  • ‘AI의 결과물 평가하기’ 레시피 (e.g., JudgeLM, PandaLM): 특정 과업을 수행한 다른 AI의 결과물이 얼마나 정확하고 유용한지, 정해진 기준에 따라 판정하는 절차. 이는 마치 요리 경연의 심사위원처럼, 명확한 채점 기준을 가진 기술입니다.
  • ‘다양한 AI 기술 통합하기’ 레시피 (e.g., Harness²):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AI 에이전트들을 하나의 작업 흐름 안에서 조율하고 관리하는 프레임워크. 여러 요리사들의 작업을 지휘하는 총주방장의 역할과 같습니다.
  • ‘새로운 레시피 개발하기’ (e.g., 구글 브레인(GBrain)의 연구): 기존에 없던 문제 해결 방식을 고안하고, 이를 새로운 ‘기술’로 표준화하여 서랍장에 추가하는 연구 개발 절차 그 자체.

이러한 접근법은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암시합니다. 첫째, 효율성과 안정성이 극대화됩니다. 매번 확률에 기반해 새로운 답을 생성하는 대신, 검증된 절차를 따르므로 결과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둘째, 시스템의 확장성이 용이해집니다. 새로운 기능이 필요할 때마다 거대한 모델 전체를 재훈련할 필요 없이, 새로운 ‘스킬’ 하나를 추가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식에서 지혜로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술적 효율성을 넘어, 지능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낱개의 사실을 아는 것(Knowledge)과, 그 지식을 활용해 무언가를 해낼 줄 아는 것(Wisdom)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대규모 언어 모델이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학습한 박식한 학자에 가까웠다면, JudgeLM과 같은 평가 기술로 검증되고 Harness² 같은 프레임워크 위에서 작동하는 AI 에이전트는 다양한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장인(匠人)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의 나열을 넘어, 절차적 기억과 문제 해결의 노하우가 지능의 형태로 조립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서랍장은 어떻게 채워질까

AI 에이전트와 스킬의 조합은, 어쩌면 인공지능이 하나의 거대하고 전능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줄지도 모릅니다. 대신 우리의 세상은 수많은 전문 기술을 가진, 작고 유능한 AI 조수들로 채워질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이 AI 장인들에게 어떤 ‘레시피’를 가르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서랍장에 어떤 ‘기술’들을 채워 넣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설계자의 역할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지능을 통째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작업을 수행하는 레시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평가하고(JudgeLM) 더 나은 기술을 연마하는 법(Harness²)까지, 유용한 기술들을 하나씩 조립하고 조합하여 더 큰 지혜를 만들어가는 과정. 이는 마법보다는 공예에 가까운, 어쩌면 훨씬 더 인간적인 지능의 미래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