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 가던 시절, 많은 유태인들은 이것도 지나가리오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버텼다.

특히 음악인들 중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일반인들 보다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 연주가들이 나치의 세력이 점점 커짐에도 불구 하고 피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혈통을 숨기거나 살짝 살짝 임기 응변을 하면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어차피 다른곳에서 생존을 위한 연주가 자리를 찾는것은 극히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후버만 (Bronislaw Huberman) 은 결사적으로 독일에서 연주를 거부하였다.

1933년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연주 초정을 하였을때 후버만은 J’accuse(나는 고발한다) 라는 답장을 통해 단호히 거절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에 남아 있던 유대인 연주가들은 탈출도 할 수 없게 되었고 나치가 만든 수용소에 들어가 죽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다니니 등 수많은 명기도 나치에게 빼앗겼다.

나치는 워낙 질 좋은 고급 바이올린들을 많이 획득할 수 있었기에 게토에 따로 유태인 압수 바이올린 창고를 만들 수 있을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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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만 역시 남아 있었다면 그의 2대의 스트라디와 1대의 과르네리를 모두 빼앗겼겠지.

후버만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중 깁슨은 (1713년산 Antonio Stradivari(1644-1737) “Gibson, ex Hubermann”) 1919년 호텔에서 도난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가 1936년 다시 도난을 당했다.

도난을 당해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인 3만불 전액을 보험으로 다 받았는데, 그 후 어찌된 일인지 시장에 다시 나와 2001년 이후 죠슈아 벨이 사용하고 있다.

가격은 그때 충분한 감정가가 3만불 (약 3천만원) 인게 지금은 최소 500만불 (약 50억) 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바이올린은 투자로서 가치가 있다.

후버만의 경우는 휴머니즘과 관련된 사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치의 행동들이 잘못된것이고, 피하고 결사적으로 싸워야 할 듯이 나왔던것이다.

지금 음악가인 여러분은 어떤가? 정치 사회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브루조아에 기대어 노예로서 살기를 바라는가?

 

후버만 연주를 들으면서 의식화된 음악가가 되도록 노력하자.

후버만 연주를 찾다가 그의 특징인 곡에 대한 깊은 지적 통찰력과 곡의 핵심을 명확히 표현해 내는 점이 잘 보여지는 브루흐의 콜니드라이가 있다.

이거 길고, 지루하고 졸릴 수 있는 점에 착안해서 곡을 딱 짤라서 드라마틱한 부분만 연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