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언론에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한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말. 2009 금융위기때의 뉴노멀이란 말은 금융위기의 영역이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제한적이었지만,
지금 이 말은 광범위하게 코로나19 이후 삶의 프레임으로 앞다투어 다뤄진다. 그러나 이것은 해석의
틀이 제한된 사람들에겐 아주 절망적인 이해를 줄 수 있다.
인간은 절대로 사회적 거리 두기 방식 등의 뉴노멀로
살게 조건지어 지지 않은 존재기 때문에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영구 고착화처럼 말해지면 
많은 사람들에겐 절망과 좌절을 줄 뿐이다.
주의해야 한다.
물론 한 가지 미래만 생각할 수 없기에 대응 정책 차원의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절망적인 사람들에겐 이것이 지금 독이 되기도 한다.

화요일에는 지난 35 년간 운영되어온 도시의 문화 예술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던 서점이 이 뉴노멀에 좌절해 문을 닫기로 했다. 서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지난겨울 힘든 시절을 보내다 맞이한 코로나 보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 등의 뉴노멀의 상황을 예견할 때 감당할 수 없어 사업을 접는다 한다. 
사실 이곳은 사람들이 책과 문화와 관련 서점 밖 테이블에서 서로 가까이서 침튀기며 열띤 토론을 하고 커피를 마시는 지적 분위기의 총체였다. 서점 이상의 지적 교류의 공간이었다. 
서점은 그것이 없어질 코로나19이후의 운영을 예상 하고 폐업을 결정했다. 서점은 페이스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우주의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서점의 아름다운 때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썻다. 

아쉽고 슬픈일이다.
코로나19 이후 뉴노멀에 대한 뉴스를 본 많은 분들은 같은 고민일 것이다.

그러나 난 미래는 꿈꾸고 만드는 것이기도 하니까 너무 신문 보고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미래 위험을 감지하기 위한 분석은 신문 수준으론 어려운 게 많다. 또 예측 전문가들 이라는 사람은 실행 영역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영역이다.




어려운 사업주들.. 여기도 고급 레스토랑인데 나쁜 놈들이 개판을 만들어 놨다.
내가 여기서 먹었던 곳이라 영화 같은 극 초현실이 느껴진다.
이걸 보고 역사는 발전하지만은 안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치 로마 멸망 후 중세 천년의 퇴보를 경험한 것처럼?


아니다. 지우고 다시 하면 되는 거다.
길거리의 노숙자가 넘어져 바닥에 굴렀는데 피가 흥건하다.
그러자 주저 없이 아가씨들이 달려와 챙겨 주고 사람들은 앰뷸런스 부른다.




코로나19의 두려움에도 가까이가 도와 준다.
이게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를 가까이 보살필 때 사람답다.

발레가 거리두기 하면 인형놀이 될 것이다.
운동경기가 무 관중 공연되면 바둑이 될 것이다.

이 광장에 설치된 드라이브쓰루 검사와 워킹 쓰루 검사소는
철거 했다. 검사에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 방식이 내가 있는 곳에선 적절하지 않았다.

아는 분 레스토랑에 갔다.
원래 베트남에서 피아노 전공하신 분인데
이 건물 전체 레스토랑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신 분이다.
이 분은 계속 열고 진행하고 계신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참 좋은 분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정보를 잘 가려 판단도 해야 겠지만
언론도 뉴노멀 같은 말을 사용할 때, 뉴노멀이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란걸 잊어서도 안된다.
삶은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