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홍수, 그리고 갈증
어딘가 조금 어긋난 글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완벽하고, 구성도 나무랄 데 없지만, 끝내 마음에 닿지 않는 문장들. 마치 잘 닦인 유리창 너머로 풍경을 보는 듯, 선명하지만 아무런 감촉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글들입니다.
기계가 빚어낸 이 유창한 문장들의 범람 속에서, 저는 역설적인 현상을 목격합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투박하고 서툴더라도 솔직한 이야기에 대한 깊은 갈증입니다. 흥미롭게도, 글쓰기 플랫폼 ‘미디엄(Medium)’은 최근 이런 현상을 ‘글쓰기의 부흥(Writing Revival)’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AI 시대에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관찰은, 기술의 진보가 인간 고유의 가치를 잠식할 것이라는 통념에 잔잔한 파문을 던집니다. 인간적인 것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관찰자가 아닌 설계자다
최근 미디엄이 기획한 한 행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생각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들은 AI 시대의 글쓰기를 논하면서, 단순히 AI를 활용하는 기술적 방법을 넘어 ‘어떻게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고 증폭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소개된 세션 주제들은 AI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 의도적 설계의 중요성: 디자이너는 AI가 단지 아이디어를 가속하는 것을 넘어, 오직 ‘나’만이 가져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한 설계 프레임워크를 논합니다. AI를 부리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데이터 과학자는 개발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 만큼 신뢰도 높은 AI 시스템을 만드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책임과 신뢰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를 기술에 부여하려는 시도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 기술의 방향과 철학을 결정하는 설계자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정답의 시대, 질문의 가치
AI가 무수히 많은 ‘그럴듯한’ 정답을 쏟아내는 세상에서, 진정한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한 연사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당신의 엣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는 능력보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좋은 질문은 나의 관점, 나의 호기심, 나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나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고유성의 증거입니다.
나아가 ‘돌봄(Caring)’이 경쟁력이 된다는 주장이나, 20년 치의 글을 AI 코치로 만들었다는 사례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집니다.
- 경험의 축적: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글은 단순한 텍스트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결, 고민의 흔적, 지혜의 무게가 담겨있습니다. AI는 그 패턴을 학습할 순 있어도, 그 시간을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 마음의 연결: 무언가에 마음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 즉 ‘돌봄’은 효율과 최적화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독자의 마음에 가닿는 글은 결국 쓰는 이의 진심 어린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도구를 탓하지 않는 장인의 자세
결국 AI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도구든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철학과 손길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자동으로 완벽한 문장을 생성해주는 기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쓸 것인지, 왜 써야 하는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수많은 정보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더욱 섬세하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배기를 가려내는 예리한 눈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예리한 눈으로, 마침내 우리가 길어 올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단 하나의 문장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