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잔인한 내용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Foucault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6일)는 감시와 처벌에서  다음과 같은 처형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엥이라는 사람에 대한 판결문인데요,

그대로 옮겨 봅니다.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123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입니다. 이건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도 그랬습니다. 조선시대 대역 죄인에 대한 능지처참형이 이것이죠.

이런 공개된 폭력을 통해  두려움을 느끼는 ‘비열한 나’를 권력은 조정했죠.
이 보다 더 강력한 것도 많았죠.

고통으로 몇일이 가는 능지(凌遲)도 청말까지 실행되었죠.
산 채로 살을 회뜨는 형벌로, 계속 몇일간 살아 있기 때문에 주로 정치범등 체제 반역자에게 실시하는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그러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감시와 처벌의 기술은 근대화와 더불어 바뀝니다.

더이상 공개적 공포감으로는 ‘비열한 나’를 만드는데는 부족하죠.

그래서 공개적으로 모두 패지합니다. 모두 미시적 감시로 비열한 나를 만듭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의 시선은 나의 감옥이라는 명제가 이를 쉽게 설명하죠.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선 오히려 우리 스스로 감옥을 만듭니다. 

타인의 시선의 감옥이죠.

웹 2.0 시대의 협력적 사회 (Collaborative Society) 라는 모토에서 우리는 팔로우와 좋아요에 의해 평가 받게 됩니다.

기존의 신용은 페이스북의 좋아요, 트위터의 팔로우와 같은 평판이 대체 하게 됩니다.

기존 형별과 다른 미시적 형태로 모두에게 고통이 미시적으로 전이된 세계가 된겁니다.

collab-consumption-infographic